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랴쿠 덴노 (문단 편집) == 기타 == 중국 사서인 《송서》와 《양서》에는 왜왕 무가 주변 여러 국을 공략하고, 세력을 확장한 양상이 표현되어 있는데, [[구마모토현]] 다마나 군 [[나고미]] 정의 에타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은 상감 철검 명문과 [[사이타마현]] [[교다시]]의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금착명(金錯銘) 철검 명문에 나오는 '獲加多支鹵大王'(획가다지로대왕)이라는 명칭은 '幼武尊'(와카타케루노미코토)의 음을 따서 적은 것으로 해석되어, 유랴쿠 덴노는 고고학적으로 실존이 증명되었다. [[아마테라스]] 여신을 모시는 [[이세 신궁]](伊勢神宮)의 외궁(外宮)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세 신궁은 본래 제11대 [[스이닌 덴노]]가 만든 것이라고 하며, 이전 시기부터 내려오던 것이었다. 원래 도요우케노오카미(豊受大神)는 [[카츠라기|카츠라기씨]]가 섬기던 신으로 카츠라기씨가 몰락한 뒤 제대로 섬겨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숭경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단바국에서도 모시고 있었던 것을 유랴쿠 덴노 22년, 즉 서거 1년 전에 외궁을 세워 수습하기로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설이 있다. 도요우케노오카미와 이름이 비슷한 이이토요노스메라미코토(飯豊天皇)는 그 여진 속에서 정무를 맡았을 가능성도 있다. 유랴쿠 덴노의 황녀로서 재궁(斎宮)이 되었다는 다쿠하타히메(栲幡姬)가 유에(湯人, 왕자녀의 목욕 등을 맡은 직책) 다케히코(武彦)의 아이를 가졌다는 아베노오미 구니미(阿閇臣国見)의 참언 때문에 무죄를 호소하며 자결한 사건이 《일본서기》 유랴쿠 3년 4월 조에 실려 있는데, 황녀의 어머니인 카츠라기노 가라히메가 아버지 카츠라기노 쓰부라에 의해 즉위 이전의 유랴쿠 덴노에게 비로서 바쳐졌다는 기사로부터 약 3년 뒤에 벌어진 일로서, 바쳐지기도 전에 가라히메가 다쿠하타히메를 낳았다는 것은 연대상 맞지 않으며, 오히려 앞에서 기록한 참언 사건이 외궁의 건립과 연대가 가까운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또한 아베노오미 구니미는 참언이 거짓으로 드러난 뒤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으로 달아났다. 《고사기》에는 즉위 전의 유랴쿠 덴노를 '오오하쓰세노미코'(大長谷王)로 표기한 것이 자주 보이는데, 통상 즉위 이전의 천황을 '미코토'(命)라 부르는 《고사기》에서 '미코'(王)라는 칭호가 쓰인 것은 이례적이다. 유랴쿠 덴노의 치세는 당대 치고는 길었지만, 그에 대한 일화를 보면 가족들을 죽이며 대왕위를 차지하고, 유지를 위해 누구든지 죽이는 그 모습에서 권력이라는 게 얼마나 비정하고 뒤숭숭한~~[[막장 드라마]]인~~지를 실감할 수 있다. [[분류:천황]][[분류:418년 출생]][[분류:479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